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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구한 삶의 주인공 아담 크랩서 끝내 한국으로

기구한 삶으로 화제가 됐던 한인 입양인 아담 크랩서(한국이름 신송혁.41)가 기억에 없는 생모의 나라 한국으로 끝내 추방됐다. 17일 AP통신 보도에 따르면 크랩서의 추방 재판 변호를 맡았던 로리 월스 변호사는 이날 저녁 크랩서는 한국에 도착했다고 밝혔다. 이민세관단속국(ICE)도 이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로즈 리치슨 ICE 대변인에 따르면 크랩서는 ICE 추방단속요원의 보호감시를 받으며 항공기에 탑승했으며 안전하게 한국에 도착했다. 약 40년 전 세살배기로 입양됐던 크랩서는 양부모의 학대와 두 차례의 파양 등을 겪으며 입양 후 수십년이 지나도록 시민권을 취득하지 못했다. 양부모들의 간과로 체류 신분이 불분명했던 크랩서는 불우한 젊은 시절 저질렀던 경범죄 전과가 드러나며 추방위기에 처했다. 크랩서는 가족 위협 등의 혐의로 유죄 평결을 받고 약 두 달간 실형을 산 뒤 석방되던 지난 2월, ICE에 체포돼 워싱턴주 타코마에 있는 이민구치소로 이감됐다. 이후 8개월 만인 지난 10월 이민법원은 결국 크랩서에게 추방 판결을 내렸다. 크랩서는 추방 유예 요청을 스스로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AP통신에 따르면 그는 추방 판결에 대한 상소를 진행할 수도 있었지만 이민구치소 수감 생활에 큰 어려움을 겪으며 스스로 상소를 포기했다. 크랩서는 한국에서 경상북도 영주에 거주하고 있는 생모와 함께 살게 될 예정이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16일 "한국에서 장애와 경제적 빈곤으로 홀로 살고 있는 생모가 오래 전 떠나보낸 아들 크랩서를 기다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 "미국으로 입양됐지만 양부모의 간과로 적절한 시민권 취득 절차를 밟지 못한 채 체류 신분 문제 등을 겪고 결국 언어 소통조차 어려운 한국으로 추방되는 사례가 꽤 있다"고 덧붙였다. 이조은 기자 lee.joeun@koreadaily.com

2016-11-18

"함께 굶는 한이 있더라도 아들을 곁에 두었어야 했다"

"나는 영어를, 아들은 한국어를 못하지만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참 많다. 그리고 용서를 구하고 싶다." 기구한 삶으로 화제가 됐지만 결국 추방 판결을 받은 입양인 아담 크랩서(41·한국이름 신송혁) 생모의 사연이 16일 뉴욕타임스(NYT) 온라인판에 소개됐다. 곧 한국으로 추방되는 크랩서를 기다리고 있는 생모 권필주(61)씨는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내 아들이 그렇게 힘든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함께 굶는 한이 있더라도 아들을 곁에 두었어야 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것"이라고 토로했다. 경상북도 영주에 거주하고 있는 권씨는 40여 년 전 3살배기 아들 크랩서를 고아원에 보내며 아들과 생이별했다. 아들이 미국으로 입양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지난해 크랩서에 관한 언론 보도가 이어지면서다. 권씨는 "(입양 보낸) 아이를 항상 그리워했다. 특히 비가 내리고 눈이 내릴 땐 더 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들이 어디에선가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마음을 다스렸다"고 말했다. 1978년 미국으로 입양된 크랩서는 양부모들의 학대와 두 차례의 파양 등 기구한 삶을 겪었다. 또 양부모들의 간과로 40세에 이를 때까지고 시민권 취득 절차를 밟지 못했다. 홀로 자립하며 재기를 다짐했지만 젊은 시절 경범죄 전과가 드러나 추방 위기에 처했다. 지난 2월 크랩서는 A급 경범죄에 해당하는 '가족 위협' 혐의로 이민세관단속국(ICE)에 체포, 워싱턴주에 있는 타코마 이민구치소에 수감됐다. 지난달 25일 워싱턴주 이민법원은 크랩서에 대한 추방유예 요청을 수용하지 않고 결국 한국으로 추방 판결을 내렸다. <본지 10월 26일자 A-4면> 크랩서는 수주 내 한국으로 추방돼 생모 권씨와 함께 살게 될 예정이라고 NYT는 보도했다. 또 "크랩서 외 일부 입양인들이 양부모들의 간과로 시민권 절차를 밟지 못한 탓에 불체자가 되거나 전과로 인해 한국으로 추방됐다"고 설명했다. 신문은 생모 권씨의 기구한 사연도 소개했다. 권씨는 어릴 적 받은 한의학 치료가 잘못돼 왼쪽 다리가 마비된 상태로 수십 년을 살아왔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아버지는 뇌성마비를 앓고 있는 남성에게 권씨를 맡겼다. 그로부터 약 1년 반 후 권씨는 한 목수를 만나 크랩서를 비롯한 자녀 셋을 두었다. 하지만 자녀들의 아버지인 목수는 권씨를 신체적으로 학대했고, 끝내 권씨와 자녀들을 버리고 도망갔다. 이후 권씨는 경제적 빈곤과 홀어머니라는 수치심에 크랩서를 비롯한 자녀들을 고아원에 보내며 재기를 다짐했다. 이후 결혼한 남성과 몇 년 전 사별하며 현재는 작은 집에 홀로 살고 있는 상황이다. 이조은 기자

2016-11-16

"내 아이는 나 처럼 부모없이 키우고 싶지 않습니다"

양부모들 학대와 두 차례 파양 절망적이던 청년시절에 범죄 유혹 2번째 수감생활서 인생의 전환점 범죄와 결별 결심 후 미용기술 배워 출소 후 가족과 행복한 생활도 잠깐 영주권 재발급 과정서 '전과자' 발목 "내 아이들만큼은 아버지 없이 자라지 않도록 무엇이든 할 테니 미국에 남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아담 리처드 크랩서(40). 한국이름이 신송혁인 그가 지난 2일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이민법원에서 열린 추방재판 심리에서 판사에게 호소한 말이다. 추방재판 후로 미뤘다가 비로소 전화와 e메일을 통해 진행된 인터뷰에서 그는 "내 자녀들에게 나보다 나은 삶을 살도록 해 주는 것이 소망"이라고 밝혔다. "입양된 이후 한 번도 미국 바깥으로 나가 본 적이 없다"는 그는 "국제입양 제도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잘못될 경우 "아무 데도 호소할 곳이 없다"는 것이 이유. 철저하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목소리다.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모국에 대한 궁금함은 있다"면서도 "미혼모를 비롯한 소외된 계층을 위한 사회복지 시스템은 창피한 수준"이라고 꼬집었다. "한국은 물론 어릴 적 지냈던 보육원이나 생모에 대한 아무런 기억을 갖고 있지 않다"는 그는 "친누나(신송아)와는 내가 9살 때 누나가 10살 때 헤어졌다가 2012년에 처음으로 재회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서로 너무 다른 환경에서 성장해서 자주 연락하고 지내지는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만큼 그에게 있어 지금의 가족은 소중하다. 그는 "아내와 아이들로 구성된 가족이라는 것이 내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입양인이 아니고서는 진정으로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내 아이들이 성장하는 동안 건강하고 행복하게 커가는 것을 지켜보고 싶다"고 소망했다. 이어 "미국은 나에게 가족을 약속했고 그래서 한국에서 보내졌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며 "내가 아니라면 나의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약속을 지켜주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신송혁이라는 이름은 낳아준 어머니가 지은 것으로 알고 있다"는 그는 공교롭게도 추방재판이 열렸던 4월 2일이 생일이다. 입양서류에 1975년생으로 출생지는 '미상'으로 나와 있다. 미국서 발행된 출생증명서에는 서울에서 태어난 것으로 돼 있지만 아마도 입양기관인 홀트아동복지회의 주소를 딴 것으로 추측된다. 세 살 무렵 친누나와 함께 제천어린이집으로 버려진 후 "누나와 함께 기독교 가정에 입양되는 것이 좋다"는 사회복지사의 판단에 따라 1979년 3월 8일 하와이주 호놀룰루로 입국한 다음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의 스티븐·주디스 라이트 부부에게 입양됐다. 이름도 아담 리처드 라이트로 바뀌었다. 그는 "라이트 가족은 루터란교 가정이었지만 가정 내 폭력이 심했다"며 "보육원이 훨씬 평화롭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집 맏아들이 아담의 누나를 성폭행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가 11살 때인 1986년 라이트 가족은 이들을 파양하고 오리건주 아동서비스국에 의해 맡겼다. 약 18개월 동안 고아원과 위탁가정을 전전하다 12살 때인 1987년 10월 오리건주 살렘의 토마스·돌리 크랩서 가족에게 입양됐다. 성은 1989년 다시 크랩서로 바뀌었다. 그는 "크랩서 가족과는 12살 때부터 살기 시작해 쫓겨날 때인 16살 때까지 함께 살았다"며 "입양 첫 날 이불에 오줌을 쌌다는 이유로 다음날 아침 '빅 레드'라고 불렀던 나무 몽둥이로 맞아야 했으며 이후 5년 동안 수시로 맞고 목 졸리는 등의 폭행은 일상이 됐다"고 회고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닐 동안 교내에서 유일한 아시안이었다"는 그는 "학교에서도 많은 시달림을 당했다"고 밝혔다. 결국 14살 때 괴롭히던 상급생의 입에 주먹을 날렸고 정학을 당했다. 학교로 다시 돌아갔을 때 그 학생은 친구 4명과 함께 아담을 때리기 위해 싸움을 걸었고 그들 중 한 명의 얼굴을 공구로 가격한 아담은 소년원에 가게 됐다. 1991년 6월 함께 지내던 입양아 중 한 명이 크랩서 가족의 행동을 친부모에게 알렸고 주정부의 조사가 시작돼 아담과 크랩서 부부의 친아들을 제외한 모든 아동들을 그 집에서 데려갔다. 크랩서 부부는 강간, 성적 학대 등 34개 항목으로 기소됐다. 크랩서 부부에 대한 기사는 아담의 학교 사물함에 도배됐고 결국 아담은 15세때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아담은 후에 검정고시를 통해 고졸 학력을 취득했다. 크랩서 부부의 재판 당시 그는 "친누나를 다시 만나게 해 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부부에게 유리한 증언을 했다"고 설명했다. 결국 크랩서 부부는 12개의 중범죄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처벌은 구류 90일과 2년 보호관찰, 그리고 약 5000달러의 벌금에 그쳤다. 16살이 되던 해 크랩서 부부에 의해 집에서 쫓겨난 아담은 1년여를 차에서 자면서 홈리스처럼 지냈다고 했다. 그는 "이때 정말 심각하게 자살을 결심했다"며 "인생에서 가장 절망적이었던 시간"이라고 회고했다. 18세가 될 무렵 그는 크랩서 가족의 집에 유리창을 깨고 침입했다. "한국의 고아원에서부터 가져온 고무신과 한글 성경책을 찾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결국 반지 등의 귀중품이 없어졌다는 양모의 거짓 증언에 의해 1급 주택침입죄가 적용됐고 유죄를 인정하면 18개월 보호관찰로 끝날 것이라는 양부의 회유에 응했으나 두 차례의 소년 범죄 경력이 있던 그에게 돌아온 것은 25개월 징역형이었다. 그는 출소 후 두 번째 길거리 생활 도중 차량 절도 등의 범죄를 저질러 다시 19개월 징역형을 받았다. 아담은 "두 번째 수감생활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며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다짐한 후 교도소 내 미용학교에 등록해 기술을 배웠으며 출소 후 가게를 열고 처음으로 자립적 삶을 살게 됐다"고 말했다. 이후 자동차 보험 산정 자격증을 따서 보험회사에서 일도 했고 미용학교도 졸업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결코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15여 년에 걸친 요청에도 입양서류와 출생증명서를 주지 않던 크랩서 부부에게서 서류를 넘겨 받아 마침내 영주권 카드를 재발급을 신청한 것이 2012년. 하지만 신원조회 과정에서 과거 전과가 드러났고 국토안보부는 그를 추방재판에 회부했다. 그는 현재 부인 앤 홍 구옌, 큰 딸 크리스티나(5), 14개월 된 크리스탈-킴과 함께 워싱턴주 밴쿠버에서 살고 있으며 5월 12일에는 새 아이가 태어날 예정이다. 2001년 전 부인과 사이에서 출생한 아들도 있지만 함께 살지는 않고 있다. 박기수 기자

2015-04-10

"내 자식 위해 미국에 남길 바란다"

가족의 소중함 내 처지 아니면 이해 못해 아이들 잘못될 경우 호소할 곳 전혀 없어 한국 소외계층 복지 시스템 창피한 수준 이 나라가 약속한 '가족' 꼭 지켜줬으면 "내 아이들만큼은 아버지 없이 자라지 않도록 무엇이든 할 테니 미국에 남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양부모들의 학대와 두 차례의 파양. 그로 인한 젊은 시절의 방황은 '전과자'라는 낙인으로 돌아왔고 결국 한국으로 쫓겨날 위기에 처한 아담 리처드 크랩서(한국이름 신송혁.40)가 지난 2일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이민법원에서 열린 추방재판 심리에서 판사에게 호소한 말이다. 〈본지 3월 16일자 A-1면> 기구한 인생이 뉴욕타임스와 AP 등 유력 언론을 통해 집중 조명을 받고 있는 그는 추방재판 후로 미뤘다가 비로소 전화와 e메일을 통해 진행된 인터뷰에서 "내 자녀들에게 나보다 나은 삶을 살도록 해 주는 것이 소망"이라고 밝혔다. "입양된 이후 한 번도 미국 바깥으로 나가 본 적이 없다"는 그는 "국제입양 제도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잘못될 경우 "아무 데도 호소할 곳이 없다"는 것이 이유. 철저하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목소리다.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모국에 대한 궁금함은 있다"면서도 "미혼모를 비롯한 소외된 계층을 위한 사회복지 시스템은 창피한 수준"이라고 꼬집었다. "한국은 물론 어릴 적 지냈던 보육원이나 생모에 대한 아무런 기억을 갖고 있지 않다"는 그는 "친누나(신송아)와는 내가 9살 때 누나가 10살 때 헤어졌다가 2012년에 처음으로 재회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서로 너무 다른 환경에서 성장해서 자주 연락하고 지내지는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만큼 그에게 있어 지금의 가족은 소중하다. 그는 "아내와 아이들로 구성된 가족이라는 것이 내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입양인이 아니고서는 진정으로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내 아이들이 성장하는 동안 건강하고 행복하게 커가는 것을 지켜보고 싶다"고 소망했다. 이어 "미국은 나에게 가족을 약속했고 그래서 한국에서 보내졌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며 "내가 아니라면 나의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약속을 지켜주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신송혁이라는 이름은 낳아준 어머니가 지은 것으로 알고 있다"는 그는 공교롭게도 추방재판이 열렸던 4월 2일이 생일이다. 입양서류에 1975년생으로 출생지는 '미상'으로 나와 있다. "두 번째 파양 후 절망…자살 결심 하기도" 노숙 생활 중 범죄로 징역형 출소 후 자립, 새로운 삶 시작 영주권 카드 재발급 신청 중 전과 드러나 추방재판 회부 미국서 발행된 출생증명서에는 서울에서 태어난 것으로 돼 있지만 아마도 입양기관인 홀트아동복지회의 주소를 딴 것으로 추측된다. 세 살 무렵 친누나와 함께 제천어린이집으로 버려진 후 "누나와 함께 기독교 가정에 입양되는 것이 좋다"는 사회복지사의 판단에 따라 1979년 3월 8일 하와이주 호놀룰루로 입국한 다음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의 스티븐.주디스 라이트 부부에게 입양됐다. 이름도 아담 리처드 라이트로 바뀌었다. 그는 "라이트 가족은 루터란교 가정이었지만 가정 내 폭력이 심했다"며 "보육원이 훨씬 평화롭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집 맏아들이 아담의 누나를 성폭행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가 11살 때인 1986년 라이트 가족은 이들을 파양하고 오리건주 아동서비스국에 의해 맡겼다. 약 18개월 동안 고아원과 위탁가정을 전전하다 12살 때인 1987년 10월 오리건주 살렘의 토마스.돌리 크랩서 가족에게 입양됐다. 성은 1989년 다시 크랩서로 바뀌었다. 그는 "크랩서 가족과는 12살 때부터 살기 시작해 쫓겨날 때인 16살 때까지 함께 살았다"며 "입양 첫 날 이불에 오줌을 쌌다는 이유로 다음날 아침 '빅 레드'라고 불렀던 나무 몽둥이로 맞아야 했으며 이후 5년 동안 수시로 맞고 목 졸리는 등의 폭행은 일상이 됐다"고 회고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닐 동안 교내에서 유일한 아시안이었다"는 그는 "학교에서도 많은 시달림을 당했다"고 밝혔다. 결국 14살 때 괴롭히던 상급생의 입에 주먹을 날렸고 정학을 당했다. 학교로 다시 돌아갔을 때 그 학생은 친구 4명과 함께 아담을 때리기 위해 싸움을 걸었고 그들 중 한 명의 얼굴을 공구로 가격한 아담은 소년원에 가게 됐다. 1991년 6월 함께 지내던 입양아 중 한 명이 크랩서 가족의 행동을 친부모에게 알렸고 주정부의 조사가 시작돼 아담과 크랩서 부부의 친아들을 제외한 모든 아동들을 그 집에서 데려갔다. 크랩서 부부는 강간 성적 학대 등 34개 항목으로 기소됐다. 크랩서 부부에 대한 기사는 아담의 학교 사물함에 도배됐고 결국 아담은 15세때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아담은 후에 검정고시를 통해 고졸 학력을 취득했다. 크랩서 부부의 재판 당시 그는 "친누나를 다시 만나게 해 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부부에게 유리한 증언을 했다"고 설명했다. 결국 크랩서 부부는 12개의 중범죄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처벌은 구류 90일과 2년 보호관찰 그리고 약 5000달러의 벌금에 그쳤다. 16살이 되던 해 크랩서 부부에 의해 집에서 쫓겨난 아담은 1년여를 차에서 자면서 홈리스처럼 지냈다고 했다. 그는 "이때 정말 심각하게 자살을 결심했다"며 "인생에서 가장 절망적이었던 시간"이라고 회고했다. 18세가 될 무렵 그는 크랩서 가족의 집에 유리창을 깨고 침입했다. "한국의 고아원에서부터 가져온 고무신과 한글 성경책을 찾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결국 반지 등의 귀중품이 없어졌다는 양모의 거짓 증언에 의해 1급 주택침입죄가 적용됐고 유죄를 인정하면 18개월 보호관찰로 끝날 것이라는 양부의 회유에 응했으나 두 차례의 소년 범죄 경력이 있던 그에게 돌아온 것은 25개월 징역형이었다. 그는 출소 후 두 번째 길거리 생활 도중 차량 절도 등의 범죄를 저질러 다시 19개월 징역형을 받았다. 아담은 "두 번째 수감생활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며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다짐한 후 교도소 내 미용학교에 등록해 기술을 배웠으며 출소 후 가게를 열고 처음으로 자립적 삶을 살게 됐다"고 말했다. 이후 자동차 보험 산정 자격증을 따서 보험회사에서 일도 했고 미용학교도 졸업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결코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15여 년에 걸친 요청에도 입양서류와 출생증명서를 주지 않던 크랩서 부부에게서 서류를 넘겨 받아 마침내 영주권 카드 재발급을 신청한 것이 2012년. 하지만 신원조회 과정에서 과거 전과가 드러났고 국토안보부는 그를 추방재판에 회부했다. 그는 현재 부인 앤 홍 구옌 큰 딸 크리스티나(5) 14개월 된 크리스탈-킴과 함께 워싱턴주 밴쿠버에서 살고 있으며 5월 12일에는 새 아이가 태어날 예정이다. 2001년 전 부인과 사이에서 출생한 아들도 있지만 함께 살지는 않고 있다. 박기수 기자 park.kisoo@koreadaily.com

2015-04-06

미국 입양아 30년래 최저, 2004년보다 75% 줄어

지난해 미국으로 입양된 해외 아동 수가 1982년 이후 최저로 떨어졌다. 미 국무부가 1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4 회계연도에 미국으로 입양 온 외국인은 총 6641명이다. 1982년 당시에는 5749명이었으며 2004년 2만3000명까지 증가했다가 계속 감소하는 추세다. 입양을 가장 많이 보내는 국가는 중국으로 2014년에는 총 2040명으로 조사됐다. 2004년 당시 8000명에 육박했던 것과 비교해서는 많이 줄었다. 두 번째로 많은 입양아를 보낸 국가는 에티오피아로 총 716명을 보냈다.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우크라이나와 아이티가 각각 3위와 4위를 차지했다. 한국의 경우는 2000년대 초 2000명에 달했으나 많이 줄어 2013년에는 138명, 2014년에는 370명이 미국으로 왔다. 많이 감소했지만 여전히 가장 많이 입양을 보내는 나라 최상위권에 속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일 이 같은 자료를 보도하며 전세계에서 발생하는 저출산 현상과 규제 강화로 인해 입양아가 줄어들고 있다고 분석했다. 강화된 규제 중 하나는 아이들의 출생 및 신분 확인 절차다. 고아인줄 알고 입양했으나 나중에 친부모가 살아 있어 연락이 오는 일, 또는 인신매매 피해 아동 입양을 최소화하려는 취지다. 트리시 매스큐는 국무부 입양 담당자는 1일 WSJ에 “양부모 입장에서 친부모가 있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지면 매우 곤란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해외 입양이 줄어들고 있는 이유로는 몇 가지가 있다. 가장 많았던 2000년 대 중반 인기 여배우 안젤리나 졸리가 에티오피아의 한 아이를 입양하는 등 해외 입양 건수는 계속 증가했다. 하지만 과테말라와 캄보디아 등 인신매매와 연관된 입양 사례 등이 보고되면서 규제가 강화되기 시작했다. 중국의 정책 변화도 한몫을 했다. 중국은 국내 입양 장려 정책을 도입했고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우선적으로 해외로 보내고 있다. 2005년 5000명을 훌쩍 넘었던 러시아는 2013년부터 미국으로의 해외 입양을 전면 중지시켰다. 러시아 인권 상황에 대한 미국의 제재 조치에 따른 것이다. WSJ는 이러한 복잡한 절차 때문에 입양을 기다리는 부모가 10여 년을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고 소개했다. 계속 감소하는 해외 입양아 수로 인해 미국 내 고아를 입양하는 수도 늘고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현재 아이를 원하는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 자료인 2007년 당시 미국 내에서 입양된 아이는 1만8000명으로 조사됐다. 비영리재단인 전미입양위원회 척 존슨 대표는 “경제 불황 이후 아이를 포기하는 부모가 늘어 이 수는 더욱 증가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영남 기자 kim.youngnam@koreadaily.com

2015-04-02

입양 한인 추방 '운명의 날'

36년 전 미국에 입양돼 추방위기에 놓인 신송혁(39·애덤 크랩셔)씨의 추방 재판 최종 선고가 오늘(2일) 열린다. 그의 사연은 지난 14일 NBC 등 주류 언론에 의해 소개돼 한인 사회에 화제가 됐다. 최종 선고를 하루 앞둔 1일 AP통신과 뉴욕타임스 등 주류언론들이 다시 그의 이야기를 보도했다. 무책임한 양부모와 이민법의 맹점 사이에서 불법체류자로 살아야 했던 그의 사연이 재차 소개됐다. 1979년 세살 때 한국 제천에서 누나와 함께 미시간주로 입양된 그는 양부모로부터 7년간 성폭행 등 갖은 학대에 시달렸다. 12살때 또 다른 가정에 입양됐지만 학대는 다시 이어졌다. 열여섯에 집을 뛰쳐나가 노숙생활을 하다 배고픔에 물건을 훔쳤다. 또, 양부모집에 두고온 물건을 가지러 갔다가 붙잡혔다. 두고온 물건은 낳아준 엄마의 기억이 담긴 고무신, 한글 성경이었다. 그래도 꿋꿋하게 세상과 맞섰다.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발소를 차렸고, 결혼도 했다. 아이가 셋이고 5월에 넷째가 태어난다. 겨우 행복을 거머줬다 싶었지만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 지난 1월 그에게 이민국 수사관들이 찾아와 추방 절차를 통보했다. 전과 때문이다. 2000년 연방의회는 모든 입양아는 자동으로 시민권을 취득하도록 하는 '아동시민권법(Child Citizenship Act)'을 제정했지만, 소급적용되지 않아 신씨는 구제받지 못했다. 신씨는 "양부모들에게 시민권 신청을 해달라고 수차례 간절히 요청했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며 "입양아들에게 미국 정부가 약속한 '더 나은 삶'을 내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지켜달라"고 말했다. 아시아계 이민자 권익 옹호 단체들은 신씨의 추방을 막기 위한 서명 운동을 벌이고 있다. 1일 현재 온라인 서명 사이트(http://action.18mr.org/crapser/)에는 1만3000여 명이 서명했다. 목표인 2만5600명에 아직 1만2000여 명 부족하다. 정구현 기자

2015-04-01

30대 입양인 불체자 전락 '추방 위기'

30여 년 전 미국에 입양된 뒤 학대와 폭행에 시달렸음에도 재기에 성공한 한국계 입양인이 미국서 추방될 위기에 놓였다. 양부모들이 입양 당시 미국 국적 취득을 시켜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졸지에 불법 체류자로 전락하게 된 그의 사연이 전해지자 이민자 권익 옹호 단체들은 추방을 막아달라는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안타까운 사연의 주인공은 애덤 크랩서(한국명 신송혁)다. 14일 NBC 등 미국 언론은 입양법 개정 운동과 함께 그를 소개했다. 그는 1979년 미국 미시간주의 한 가정에 누나와 함께 입양됐다. 어린 그에게 찾아온 건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었다. 5년간 성적 학대를 포함해 온갖 폭행에 시달리다 파양된 그는 1년 뒤 다시 오리건주의 한 가정에 입양됐다. 여기서도 양부모는 성적 학대 등을 일삼았다. 목을 조르고 화상을 입히는 건 다반사였다. 양아버지는 “자동차 열쇠를 못 찾겠다”며 14살 된 애덤의 코뼈를 화풀이 삼아 부러뜨리기도 했다. 1991년 크랩서 내외는 아동 구타와 성적 학대로 체포됐지만 90일 구류와 가벼운 벌금형에 그쳤다. 이후 애덤은 노숙생활을 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지만 불운을 딛고 일어섰다. 현재는 결혼해 아이 셋을 둔 가장이 됐다. 오는 5월이면 넷째가 태어날 예정이다. 문제는 그의 신분이 불법체류자라는 점이다. 그를 입양한 뒤 학대만 일삼았던 두 가정 모두 크랩서의 미국 시민권 신청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는 미국에서 입양아에게 자동으로 시민권이 발급되지만 2000년 이후부터의 일이다. 즉 2000년 이전에 입양된 크랩서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특히 크랩서는 과거 방황하던 시절에 절도를 저지른 전과가 있어 우선 추방 대상이 됐다. 크랩서는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과거에 양부모들에게 시민권 신청을 해달라고 간절하게 요청했지만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은 여기서 더 나은 삶을 우리(입양아)에게 약속했다”며 “그 약속을 내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지켜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아시아계 이민자 권익 옹호 단체들은 애덤 크랩서의 추방을 막아달라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15일 현재 그의 추방을 막자는 온라인 서명 사이트(#KeepAdamHome)에는 8000명 이상이 지지서명을 했다. 권익 단체들은 10만여 명으로 추산되는 한국계 입양아 중에서 크랩서와 같은 피해사례가 나오지 않도록 2000년 이전 입양됐더라도 자동으로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도록 법 개정 운동도 같이 벌이고 있다. 한편 크랩서의 추방은 내달 2일 법원에서 최종 심사를 앞두고 있다. 서유진 기자

2015-03-16

입양→학대→파양→불체자… 한인 애덤 크렙서의 기구한 사연…"추방만은 막아야" 서명운동

30여 년 전 미국에 입양된 뒤 학대와 폭행에 시달렸음에도 재기에 성공한 한국계 입양아가 미국서 추방될 위기에 놓였다. 양부모들이 입양 당시 미국 국적 취득을 시켜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졸지에 불법 체류자로 전락하게 된 그의 사연이 전해지자 이민자 권익 옹호 단체들은 추방을 막아달라는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안타까운 사연의 주인공은 애덤 크랩서(한국명 신송혁)다. 14일 NBC 등 미국 언론은 입양법 개정 운동과 함께 그를 소개했다. 그는 1979년 미국 미시간주의 한 가정에 누나와 함께 입양됐다. 어린 그에게 찾아온 건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었다. 5년간 성적 학대를 포함해 온갖 폭행에 시달리다 파양된 그는 1년 뒤 다시 오리건주의 한 가정에 입양됐다. 여기서도 양부모는 성적 학대 등을 일삼았다. 목을 조르고 화상을 입히는 건 다반사였다. 양아버지는 "자동차 키를 못 찾겠다"며 14살 된 애덤의 코뼈를 화풀이 삼아 부러뜨리기도 했다. 1991년 크랩서 내외는 아동 구타와 성적 학대로 체포됐지만 90일 구류와 가벼운 벌금형에 그쳤다. 이후 애덤은 노숙생활을 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지만 불운을 딛고 일어섰다. 현재는 결혼해 아이 셋을 둔 가장이 됐다. 오는 5월이면 넷째가 태어날 예정이다. 문제는 그의 신분이 불법체류자라는 점이다. 그를 입양한 뒤 학대만 일삼았던 두 가정 모두 크랩서의 미국 시민권 신청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는 미국에서 입양아에게 자동으로 시민권이 발급되지만 2000년 이후부터의 일이다. 즉, 2000년 이전에 입양된 크랩서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특히 크랩서는 과거 방황하던 시절에 절도를 저지른 전과가 있어 우선 추방 대상이 됐다. 크랩서는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과거에 양부모들에게 시민권 신청을 해달라고 간절하게 요청했지만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은 여기서 더 나은 삶을 우리(입양아)에게 약속했다"며 "그 약속을 내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지켜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아시아계 이민자 권익 옹호 단체들은 애덤 크랩서의 추방을 막아달라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15일 현재 그의 추방을 막자는 온라인 서명 사이트(#KeepAdamHome)에는 8000명 이상이 지지서명을 했다. 권익 단체들은 10만여 명으로 추산되는 한국계 입양아 중에서 크랩서와 같은 피해사례가 나오지 않도록 2000년 이전 입양됐더라도 자동으로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도록 법 개정 운동도 같이 벌이고 있다. 한편 크랩서의 추방은 내달 2일 법원에서 최종 심사를 앞두고 있다. 서유진 기자

2015-03-15

입양아 및 다문화 가정 대상 한국문화교실 인기

"설 음식과 전통놀이 '원더풀'이예요." 남부뉴저지통합한국학교(교장 김정숙)는 설을 맞아 지난 21일 뉴저지주 보히스에 있는 열방교회에서 입양아 및 다문화 가정을 대상으로 2월 한국문화교실을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는 특히 커피전문점 카페베네 미주법인 대학생 그룹인 베네스타1기 대학생 10명이 참가해 입양아 및 다문화 가정을 위해 한식 요리교실을 선 보였다. 베네스타 대학생들은 20여 명의 참가자들과 비빔밥 잡채 궁중떡볶이 불고기 등 다양한 한국 음식을 같이 만들며 요리법을 전수했다. 입양아 및 다문화 가정 참가자들은 자신이 직접 만든 한국 음식을 서로 맛 보며 "원더풀"을 연발했다. 요리교실에 이어 설의 대표적 전통놀이인 윷놀이와 제기차기를 체험하는 시간을 가졌다. 윷놀이에서는 어린이들이 윷을 던지고 입양아들의 부모가 직접 말이 되어 말판 위에서 움직이며 아이들에게 큰 재미와 즐거움을 선사했다. 특히 이날 한국에서 입양한 두 아들의 엄마인 캐런 베커는 그 동안 문화교실을 통해 알게 된 한국문화에 대한 지식으로 아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설을 '차이니즈 뉴 이어(Chinese New Year)'라고 잘못 표현하고 있는 것을 직접 학교에 편지를 써 '음력 설(Lunar New Year)'로 바로 잡은 이야기를 소개해 한국학교의 역할 및 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워줬다. 입양아 및 다문화 가정을 위한 한국문화교실 후원 문의는 남부뉴저지통합한국학교 안젤라 정 교사(fna@kssnj.org)에게 하면 된다. 권택준 객원기자

2015-02-26

[칼럼]자폐 입양아가 가져다 준 선물

늦은 나이 때문에 출산이 어려웠던 김춘배씨는 남편과 상의 끝에 한국에서 아이를 입양하기로 했다. 할아버지가 고아원을 운영하셨고 할머니는 YMCA에서 교육을 받으셨기 때문에 입양 결정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한달 된 지민이를 안고 온 춘배씨는 너무 행복했다고 한다. 귀엽고 잘 생긴 아들을 얻은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었다. 미국 남편과 함께 미 연방정부 공무원인 이들에게 일 끝나고 집에 돌아가 아이를 돌보는 즐거움은 참으로 큰 것이었다. 그런 지민이가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행동 발육이 늦은 감이 들었다. 처음에는 그저 조금 늦는다고만 생각하고 의사조차도 조금 기다리면 괜찮을거라고 생각했지만 지민이는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여러 검사결과 14개월 되던 해에 아이가 자폐증이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그 말 을 듣고 난 후, 춘배씨는 하늘이 무너지는 마음으로 몹시 괴로웠다고 한다.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이야기하니 남편은 너무 충격이 컷던지 받아드리지를 못하고 힘들어 했다. 그러나 춘배씨 마음에는 이 아이를 두번 버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괴로워하는 남편에게 “우리는 어른이라 우리 인생을 책임지고 살아갈 수 있지만 지민이는 우리에게서 버려지면 어떻게 되겠느냐”며 설득했다. 24시간의 시간을 달라던 남편이 드디어 지민이를 다시 받아드리기로 했다. 이래서 기른 정이 낳은 정 못지않다고 말들 하나보다. 완벽한 아이를 꿈꾸다가 자폐아를 받아 드려야하는 그들 부부의 심정이 느껴진다. 결과를 받아드리고 새로 시작하는 그들 부부의 생활은 그리 쉽지 않았다. 아무리 공무원이라 해도 아이가 받아야 하는 개인 치료비는 엄청난 부담이었고 집에 들어와도 쉬는 일보다는 지민이의 손과 발, 그리고 눈이 되어주어야 했다. 하나님은 미리 아셨을까? 춘배씨는 대학에서 특수교육을 전공했다. 이론으로만 알고 있던 특수교육이 아들을 통해 실질적으로 적용되며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내 아이의 잘못도 아닌 자폐아로 살아가야 하는 지민이를 보면서 다른 장애우들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그들 문제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아이의 장애가 결코 행복의 장애가 되지 않는다며 춘배씨는 우리 사회가 이런 장애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인생은 연습의 반복이다”라고 생각하는 춘배씨는 지민이에게 혼자 설 수 있는 있는 방법을 포기하지 않고 연습시킨다고 한다. 화장실 가는 것 부터 먹고 입는 것까지. 자폐 증세를 가진 많은 이들이 자기 몸에 손을 대는 것을 싫어하는데 그 거부감을 없애주려고 계속해서 “사랑한다” 말해주고 안아 주고 잦은 스킨쉽을 시도한다고 한다. 사랑은 받아 본 사람만이 사랑을 할 수 있다고 하는 말이 생각난다. 수많은 약중에 사랑만한 약이 있을까? 그런 춘배씨 부부에게도 걱정은 있다. 어느날 지민이보다 더 먼저 세상을 떠날 것 같은데 그 후에 지민이는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것이다. 그 아들을 위해 법적 문제와 경제적인 것까지 나름대로 준비해 놓았지만 그 상황은 두 부부를 너무 아프게 하는 것들이다. 그래도 부탁할 친척들도 없을 때에 아이가 정부에서 운영하는 시설에 들어가야 할지도 몰라 꾸준이 홀로서기 연습을 시킨다고 한다. 지민이는 엄마, 아빠에게 세상을 달리 볼 수 있는 마음을 선물했고 유띵킹이 얼마나 가치있고 행복한 것인지를 알게 해 주었다. 두번 버려지는 악몽을 꾸게하지 않으려는 부부의 유띵킹이 지민이에게 행복을 주었고 보는 우리에게는 우리의 마음을 다시 한번 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지민이가 행동도 연습하고, 사랑도 연습하여 언젠가 홀로서기는 물론 다른 자폐아를 돌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2015-02-12

ASIA 컬쳐스쿨 개강, 성인 입양인이 멘토로

 아시아 입양인 봉사회 (ASIA Families, Inc. 대표 송화강)는 지난 7일 베데스다에 있는 연합장로교회(김해길 목사)에서 2015 한국 컬쳐스쿨을 개강했다. 이번 학기에는 입양인과 입양 가족 등 모두 120여 명이 등록했다.  30명의 교사와 봉사자들은 매달 한 번씩 2월~5월, 9월~ 12월 등 모두 8차례에 걸쳐 어린이반, 청소년반, 양부모를 대상으로 한 성인반 등으로 나눠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어린이들을 위한 수업은 성인 입양인과 동포들이 함께 멘토와 교사로 봉사한다.   양부모를 대상으로하는 성인반은 성인 입양인 패널 토의를 시작으로 이번 학기에는 공예 수업, 한국 현대사 강의, 입양과 한국 문화에 관한 책을 읽고 의견을 나누는 북클럽의 순서로 진행한다.   개강식 첫날에는 4명의 성인 입양인이 자신의 성장 과정, 한국 문화에 언제부터 관심이 생겼는지, 피부색이 다른 부모 아래서 성장한 경험 등을 나누었다. 부모들은 질의응답 시간을 통해 친가족을 찾는 일에 관심이 있었는지, 현재 양부모와의 관계는 어떤지, 그리고 최근 뉴욕타임즈에 난 한국에 돌아가 정착한 한인 입양인 기사에 대한 입양인들의 생각 등을 묻기도 했다.   한글을 노래로 배우는 ‘일석이조’의 저자 세계선교교회 채효성 장로는 이날 어린 입양인과 성인 입양인들에게 일석이조를 한 권씩 선물로 증정했다.   ASIA는 컬쳐스쿨 외에도 입양가족과 입양인 대상 모국방문단(6월 23일~7월 6일), 입양가족 한국 문화 캠프인 쌀캠프(7월 23일~7월 25일)를 개최한다.   허태준 기자  

2015-02-11

한인 입양아, 메이저리거 '한발 더'

올해 프로야구 명문 구단인 뉴욕 양키스의 스프링캠프에 초대받는 남가주 출신 한인 입양아 야구선수가 '입양아들의 롤 모델'로 소개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주인공은 현재 양키스 마이너리그 소속인 로버트 레프스나이더(24·한국명 김정태·사진). 그는 애리조나대 주전 우익수 출신으로 2012년 타율 4할7푼6리를 기록하며 팀을 대학야구 월드시리즈에서 우승시키고 최우수선수(MVP)로도 선정됐다. 그 후 양키스에 입단한 그는 마이너리그에서도 통산 313경기에서 2할9푼7리의 빼어난 성적을 기록하며 올해 스프링캠프에 초대받았다. 로버트는 생후 5개월이던 1991년 누나와 함께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독일과 아일랜드출신 부모에게 입양됐다. 오렌지카운티의 라구나힐스 고교 출신인 그는 학창시절 야구 외에 농구, 풋볼에도 재능이 있는 팔방미인이었지만 미국식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외모로 인해 인종차별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바르게 성장했으며 타고난 운동소질을 바탕으로 양키스 스프링캠프에 초대받았으며 2루수로 전향해 주전선수의 꿈을 꾸고 있다.뉴욕타임스는 지난 5일, 로버트의 스토리를 집중 조명하면서 수백만 명의 입양아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로버트는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친어머니는) 나에게 가장 좋은 기회를 주기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하셨다고 믿는다"며 "나는 축복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많은 사람이 입양아들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길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그의 어머니 제인 레프스나이더는 "로버트는 생모를 만나기 원하느냐는 질문을 하면 항상 우리의 감정을 먼저 걱정해주는 아이였다"며 "만일 로버트의 생모를 만다면 이런 아이를 우리에게 보내줘서 너무 감사하다고 꼭 안아주고 싶다"고 말했다. 한편 아직 오렌지카운티에 살고 있는 로버트는 언젠가 가족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하길 희망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신승우 기자

2015-02-06

입양 한인 양키스 데뷔 임박

미프로야구(MLB) 뉴욕 양키스 마이너리그 팀 소속인 입양아 출신 한국계 유망주 로버트 레프스나이더(24)가 올시즌 핀스트라이프 유니폼을 입고 빅리그에 데뷔할 것으로 보인다. 뉴욕타임스는 6일 스포츠 섹션에 레프스나이더의 입양과 성장 과정 야구선수로서의 활약 등에 대한 장문의 특집기사를 싣고 이변이 없는 한 레프스나이더가 올해 스프링캠프를 거쳐 오는 4월 6일 토론토 랩터스와의 개막전을 시작으로 막을 올리는 2015 정규시즌에 양키스 25인 로스터에 합류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애리조나대 재학시절 불꽃타격으로 팀을 NCAA 야구 월드시리즈 우승으로 이끌며 최우수선수(MVP)에 뽑히기도 했던 레프스나이더는 지난 2012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5라운드 전체 187번 지명을 받아 양키스와 계약했다. 레프스나이더는 이후 3년 동안 양키스 산하 마이너리그 팀에서 주로 2루수로 활약하면서 통산타율 2할9푼7리 통산출루율 3할8푼9리를 기록하며 양키스 팜 최고의 유망주라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레프스나이더는 지난해 양키스 산하 더블A 팀 트렌튼에서 60경기를 뛰면서 기간타율 3할4푼2리에 6홈런 30타점 그리고 이후 트리플A 팀인 스크랜튼/윌크스-바리로 옮겨서는 77경기에 출장해 기간타율 3할에 8홈런 33타점을 마크했다. 이러한 뛰어난 성적으로 레프스나이더는 브라이언 캐시먼 양키스 단장 등으로부터 "주목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선수다. 같은 양키스 팜 출신인 로빈슨 카노 브랫 가드너와 같이 앞으로 뛰어난 선수가 될 것"이라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지난 1991년 백인계 부부에 의해 입양된 레프스나이더는 한인들이 많은 캘리포니아주 오렌지카운티에서 역시 한국에서 입양된 3살 위의 누나 엘리자베스와 함께 성장했다. 과거 대학농구팀 선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운동에 만능이었던 레프스나이더는 성장하면서 아시안으로서의 외모와 이름이 서로 맞지 않은 적지 않은 인종차별 경험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박종원 기자 / jwpark88@koreadaily.com

2015-02-06

교통사고 구조 중 숨진 소방관, 한국계 입양 청년으로 밝혀져

지난 6일 교통사고 구조구급 현장에 출동, 부상자 구조 활동을 벌이다 빙판길에 미끄러지는 차량에 치여 숨진 소방관이 한국계 입양 청년으로 뒤늦게 알렸다.   안타깝게 숨진 소방관은 메릴랜드 하포드 카운티 벨 에어와 하워드 카운티 웨스트 프렌드십 소방서에서 구조구급 대장으로 근무하던 에릭 스테시악(29, 사진)이다.   에릭은 이날 오후 1시 50분쯤 하포드 카운티 패터슨 밀 로드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했다는 신고를 접하고 현장에 출동했다.   구조 당국은 눈과 빙판길로 접근에 어려움을 겪자 사륜구동 차량 출동을 요청했다. 에릭은 밧줄을 이용하고, 사륜구동 차량은 눈을 치우면서 현장에 접근하다 차량이 빙판길에 미끄러지면서 에릭을 쳤다.   에릭은 병원으로 후송됐지만 숨졌다.   14세부터 자원봉사로 소방 구조 구급 활동을 시작한 그는 작년 11월 하워드 웨스트 프렌드십 소방서의 긴급의료 구급 대장(captain)으로 승진했다.   에릭의 장례식은 18일 가족과 친지, 동료 소방관 등 수백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열렸다.   하워드 컬럼비아에 거주하는 에릭은 1985년 11월 6일 한국에서 태어나 곧바로 오레스트 스테시악 부부에게 입양됐다.   하워드 커뮤니티 칼리지, 하워드 소방당국의 구조 구급 훈련을 거친 그는 미주리 소방당국에서 최고의 서비스 상을 받는 등 구조 구급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허태준 기자   

2015-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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